사도바울 > 사도 바울
감사합니다. 

이제 새해 들어서서 일월달도 오늘 마지막 안식일입니다. 이제 다음 안식일은 이월 달로 들어가게 되지요. 세월이 어떻게 빨리 가는지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상종말은 다가오고 우리가 다 준비되어야 되겠는데 준비가 돼 있는지 안 돼 있는지 그게 큰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얼른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시는데 빨리 오는 것보다도 내가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게 큰 문제입니다. 준비되어 있지 못하고 그날이 빨리 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옥 불에 빨리 가야죠? 그러니까 내가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에 대해 내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어떤 분인가? 여기에 대해 잘 연구해 보겠습니다. 

 

(엡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그러니까 옥에 갇혀도 주를 위해서 갇혔다면 참 좋지요.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갇혔다. 

 

(엡 3:2-4)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 사도바울의 깨달은 비밀 이 편지서들을 잘 읽어보면 그 오묘한 비밀 참 무궁한 진리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사람과 같이 사도바울의 때는 벌써 지나갔다. 그래가지고 지금은 다른 세대에 와 있다 이제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매를 맞아도 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매도 수없이 맞았고 돌에도 맞았고 태장으로 맞았고 바다의 깊음에서 여러 가지 곤란을 받았고 옥에도 갇히기도 여러 번하고, 이와 같이 살아나온 그 분이 바로 이 사도바울인데 사실상 이건 자기가 깨달았다기 보다도 엡3장3절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해 주셨다.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해 주셨다는 비밀을 우리가 사도바울의 편지를 잘 연구해보면 그 참 아주 기묘한 대목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사도바울을 헌 장돌뱅이로 생각하고 천하게 생각하는데 요새 천하게 생각하는 사람있지요? 사도바울은 벌써 지났다. 자기 때는 모른다. 그 모른다는 하는 말은 어디 있느냐 하면,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언제 그래요? 언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고 언제 그래요? 이건 세상 끝날에 가서 지금이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세상 끝날에 가서 그렇다. 그 말이예요. 만일 지금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할 것 같으면 우리 뭘로 가지고 예언할 겁니까? 그러니 이 성경을 잘못 보면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그러고는 뭐라고 했느냐? 

 

(고전 13:9-12)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가: 사도바울 자신도 포함, 그때에는: 마지막 즉 이 세상은 가고 새로운 세상이 들어와서 나를: 바울자신도) 그럼 사도바울도 그땐 온전히 안다. 그럼 사도바울이 아는 때는 언제입니까? 사도바울은 벌써 죽었는데? 이제부활을 해야 알겠죠?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래서 사랑을 아주 크게 이렇게 말하게 할 때에 여기 지금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러면 이것은 지금 이 세상 이 세대가 아니고 이 세상 끝이 다 가게 되면 아무리 우리가 예언을 잘하고 방언을 잘하고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지식도 방언도 예언도 폐한다 하는 것을 끝으로 그래서 이 기록을 전 세계적으로 성경 주석가들이 다 이것을 세상 끝에 가서 되는 걸로 말했지 지금 현재 여기서 될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문맥상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전에 울산을 갔습니다. 김춘자 전도사 있죠. 김춘자전도사님이 좀 가만히 보면 좀 말랑말랑 합니다. 빵떡 모양으로 말랑말랑 해서 가서 좀 주물러봤어요. 주물러 보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마 25:31-3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그러니까 자기도 옥에 갇혔는데 안 선생님은 옥에 안 갇혔다고 그래요. 내가 옥에 갇혔는데, 여기 엄수인 옥에 갇혔다는 아는 분 여기 있어요? 여기 다 없을 거예요. 여기 옥에 갇힌 분 아는 사람 없을 거예요. 

 

사도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에 누굴 위해서 옥에 갇혔다고 했어요? 주를 위해서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옥에 갇혔다고 그랬어요. 그럼 엄수인 옥에 갇혔다는 것 아시는 분 누가 한 번 말씀해보세요. 왜? 복음을 위해서 옥에 갇혔어요. 우리가 강단에서요 뿐만 아니라 아무데서나 남을 모해하거나 이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근데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굴 모해 할라고 하는 것보다도 그 선량한 양민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든지 꾀어가지고 지옥으로 갔다 집어넣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거는 양을 위해서 내가 목숨을 버리지 못할 망정 그 잡혀간 거 말 한마디 바로잡아서 그걸 건질 수 있으면 건져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혹시 저렇게 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꾀는 사람이 되니까 혹시나 그런데 걸려들어 갈까 봐 미리 말하는데 왜 옥에 갇혔느냐? 

그 전에 집장사를 좀 했습니다. 그분이 집장사를 좀 했어요. 집장사를 해서 집을 떡 팔아먹었는데 이모가 와서 너 그 집 팔면 너 집 구경 다한다. 집 그거 물려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참 그럴거도 같고 헐케 팔았던 같은 싶었던 모양이죠. 그래서 따라다니면서 그 놈을 갖다 해약하려니 그 집 더구나 헐게 샀다 싶은데 비싸게 샀다 싶은 생각이 들어가면 물려주지만은 헐게 샀다 싶은데 누가 물려줘요? 이놈 하다하다 그 내용은 내가 잘 노장노님 보고 돈을 같다가 돌려주라 그래 노장노님 시켰다고 그러는데 사실인지 모르지만 돌려주라고 딱 해놓고는 어떤 자리에 들어가서 시장바구니 같은데 가방에 넣어 논걸 그걸 몰래 꺼내가지고서 계약서를 찢어버렸어요. 자기 것도 찢고 그 사람 것도 몰래 빼내서 그랬단 말이에요.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영창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랬다면 나도 환영을 하지요. 김춘자 전도사 분들은 그래요? 참 옥에 계셔서 참 고생 많이 하셨네요. 혹시나 여러분 그렇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말하자면 절도, 사기, 몇 가지 겹쳐가지고 들어가서 참 내가 애를 쓰긴 썼습니다.  그때에 방OO집사님 어른 되는 양반이 부산교도소에 과장으로 계실 땐데 좀 어떻게 얘길 하고 싶어도 좋은 일하다 들어갔으면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이놈의 나쁜 일하다 들어가니까 낯짝을 들고 얘기를 못하겠어요. 그러니 자기 양심상으로도 징역 가서 살았다고 어디 가서 교도소 생활했다고 어디 가서 말 할 겁니까? 낯짝은 철갑을 턱 덮어쓰곤 내가 복음을 위해서 징역 살았다고 경찰서, 교도소 들어가 살았다고 그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이 강단에서 넘의 모해하면 안 됩니다. 강단에서 아니더라도. 혹시나 여러분들 잘못 생각할까봐 그래서 이걸 왜 그러냐? 고전13장8절 쭉 보면 우리가 지금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온전치 못한 것은 폐한다고 하니 사도바울은 다 폐했다. 사도바울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서 성경을 망칩니다. 이 성경이 참 신비의 글인데 그것을 갖다 가서는 어떤 왜 사도바울 글을 갖다 폐지됐다. 이제 다 지나갔다. 쓸데없다 하는 것을 왜 하느냐 하면 여기 여자에 말이 좀 들어있어요. 

 

(고전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바로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모든 것이 주의명령인줄 알라] 얼마나 엄숙하게 했습니까? 그러니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요걸 없애려니까 사도바울 전부를 묵살시켜야 되겠거든. 뭐 어떤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느 지방에 그 한사람을 위해서 그 전에 누가 그랬습니까? 

 

한 사람을 위해서 그 국민 전부를 갖다가 몰살시키려 한 것이 있었죠? 헤롯은 예수 한 분을 없애기 위해서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로는 전부 다 죽인일이 있었고요. 에스더서에 볼 것 같으면 옛날 저 누굽니까? 저 하만이 모르드개 한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 유대민족 전부를 몰살시켜 다 죽일라고. 한일이 있었어요. 결국 나중에는 뒤집혀서 결국 반대로 하만과 그의 모든 무리들을 몰살시킨 일이 있었는데 그 절기이름을 뭐라고 하지요? 부림절 이것은 아달월(12월) 십사일에 성경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걸 하나 없애기 위해서 여자들 잠잠 하라 요것 하나 없애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하나도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또 

 

(딤전 2:11-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그 이유는 왜냐? 

 

(딤전 2:13-15)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가정에서 잘 집을 지키고 해산함으로서 애기를 낳고 기르고 이렇게 함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나가서 활동을 해서가 아니고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는 여자는 말을 할 줄을 모르느냐? 심지어 감리교에서는 여자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 하실 때에 해와는 왜 창조하셨다고 했느냐면은 돕는 배필 남자를 돕는 배필로 쓴다고 했습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뭐하기 위해 주셨다고요? 돕는 배필. 그러니까 남자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 혼자서도 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여자는 남자와 같이 일을 하되 돕는 배필, 서로 보조적 역할 어떤 시인은 이런 말했죠.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하늘아래 있고 여자가 아무리 고고해도 남자 밑에 있다는 것을 그런 시를 지었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 성서에 두고 한 말이지만은, 근데 어떤 거는 또 쓰고 어떤 거는 또 필요 없다 하는데요.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엄수인 내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데 지금 내려왔다. 내가 너희 어머니이니까 너희는 다 자녀다 듣고 보니 기가 찹니까? 안 찹니까? 먼저 이석철이 한테도 내가 거기 가서 그런다고 아니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치마 밑에 떡 들어가서 아이고, 신부님하고 하나님하고 거기 들어가서 절하냐고 했어요. 아마 몇 일간 다니면서 몇일 있어 보니까 재미가 없던 모양이라 그 뒤로 안 나온다고. 이 성경을 너무 이 사도바울 편지에도 간단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갈라디아 4장에 있는 이 기록을 오늘날까지 사도바울의 편지서를 그렇게 연구한다고 해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갈 4:22-24)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아니 여기 순수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두언약이라. 그러니까 뭘 구원해주느냐? 하갈이나 사라가 언약이라는 말이 아니고 옛날에 그 아브라함 한 가정에서 일어난 그 사건들이 이 신약과 구약에 대해서 두 언약으로써 예언이 성취됐다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하갈은 무엇을 표상했다고요? 하갈은 아브라함의 여종입니다. 하갈을 갖다가 왜 아브라함에게 후처로 줬느냐 하면 자식 때문에 그랬어요. 자식을 낳지 못해서 사라가 나이8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어 가지고서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선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부인 사라에게 물어보니 애기 날 가망성 있습니까? 도저히 육신은 안 되겠고 단산 되어있고 경수가 끊어졌고 죽은 나무 둥지와 같은 내가 무엇을 낳겠느냐고? 그래서 생각다 못해 밤새도록 고민을 하고 생각다 못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옳지, 내가 젊은 여자를 통해 아들을 하나 보겠다. 이렇게 해서 사라가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줬어요. 사라의 생각과 같이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은 후에 무엇이 되었다고 합니까? 무엇의 예언 성취된 겁니까? 모세로 말미암는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과 지금 중동에 있는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을 표상한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옛언약을 표상했다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는 것은 무슨 언약입니까? 새언약,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우리와는 어떻게 관계됩니까? 보세요. 

(히 12:22-2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여기 22절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하는 말은 공동번역에서는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우리가 예배 드리는 곳이 어디냐? 하늘예루살렘입니다. 하늘 예루살렘. 이것이 갈4장26절의 말씀입니다. 

 

갈4장26절의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라 하는 여기가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한 땅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중동의 현재 있는 예루살렘은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또 지상의 예루살렘이 옛언약으로 들어가는 거고, 오늘 새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우리 새언약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 예루살렘을 표상한 새 언약으로서 들어간다 하는 뜻입니다. 

(갈 4:26-29)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너희는 :1900년 전에 있었던 초대교회도 들어가고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 무슨 말이냐면 (성령을 따라 낳다는거 하고 육체를 따라 낳다는거 하고 우리가 잘 구분해야 되겠는데 아까 잉태치 못한 자여 하는 것은 사54장1절에 있는 말씀인데, 그 전에 송계순씨라고 안식교에 있던 한 문서 전도하고 있던 그 분이 사54장1절을 자기 아주 기뻐했다고. 왜 그러나면 혼자서 사는데 혼자서 복음을 많이 전한다고 이건 날 두고 한말이다. 낙타 위에 누구한테 낙타를 날 위해서 만들었구나. 이건 날 위해서 있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과부로서 혼자 복음을 전하니까 내가 여자가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많다 이러니까 이건 그랬다고 우리 이런 거를 잘 분별해야 됩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자라는 것은 뭘 말한다고 했죠? 교회입니다. 창3장15절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말씀 있잖습니까?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그런 말씀이 있죠? 그것은 구속의 경륜을 말하는 건데, 그런데 여자의 후손 하게 되면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아담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의 후손이 되어 있느냐? 우리가 잘 구분해야죠. 아담의 후손이라 했는데 왜 여자의 후손이라 했느냐? 왜 그러느냐?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셨느냐면 남자가 있어서 낳습니까? 남자 없이 낳았습니까? 남자 없이 여자가 혼자 낳았죠. 성령을 따라 낳지요? 성령으로 잉태해서 낳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되어 있는 것인데. 그러면 여자가 홀로 되어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하고, 그러니까 여자가 홀로 사는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고 하는 것은 여자가 홀로 어떻게 해서 자녀를 많이 낳을 겁니까? 그것은 뭘 말 하느냐면 성령으로 낳는다는 뜻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낳는 다는 것을 여자가 홀로 사는 자의 자녀라 하는 것이죠. 

 

그러면 갈4장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약속의 자녀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삭을 어떻게 낳았어요? 이삭이 창18장 보면요 명년 이때에 내가 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에게는 하갈 보고는 너 아들 낳을 것이다. 무슨 약속했습니까? 그건 약속이 없어 육체를 따라 낳습니다. 아무 약속 없이 낳는 것은 육체를 따라 낳는 것입니다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는다는 것은 성령으로 따라 났다. 그래서 성령으로 따라 난자를 핍박한 것 같이 그때도 이삭이 낳는데 이스마엘이 핍박을 했지요? 이제도 그러하도다 하는 말은 사도당시에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대인들한테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자기가 유대교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거와 같이 그 당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는 뭘 따라 낳다구요? 성령을 따라 났다 모두 예언으로 따라났다 그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언을 따라 난 것을 성령을 따라 났다. 

 

(갈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계집종은 하갈, 하갈인데 예언에서 나타나는 계집종은 누굽니까? 첫언약, 여자로 본다면 지상의 예루살렘)

(갈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자유 하는 여자 즉 새언약) 옛언약이 아닌 두언약 중에서 우리는 어느 언약이냐면 옛언약이 아닌 새언약으로써 우리를 낳아서 그래서 자유 하는 여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랬죠?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새언약. 저 지상에 있는 중동에 있는 것은 옛언약 모세로 말미암아 세운 언약입니다. 

 

이렇게 해서 풀이해서 알아야 되겠는데 그냥 덮어놓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 어머니라니까 내가 예루살렘인데 하늘에서 내려왔으니까 내가 너희 어머니다. 너희는 다 내 아들이고 딸이다. 거기서 모두 다 어머니하고 달려들고 그러잖아요? 모르면 모르면서 그렇게 속아 넘어가면 어쩔 수 없지만 알고서는 속을 수 없는 거죠?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면 항상 말하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또 어떨 때 알기를 원하노라 항상 그럽니다. 여러분 좀 알아야지요? 모르면 그렇게 넘어가기 쉬워요? 우리가 성경이 사도바울이 기록하고 쉬운 거 그래서 사도바울의 편지서를 잘 연구하면 사도바울은 언제든지 계시가 아니면 자기가 전도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계시를 통해서 한다고 했습니다. 

 

(갈 1:11-1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언제 있었습니까? 지금 우리가 간판 붙이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것은 벌써 19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워놓으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아주 심히 핍박했다. 그랬습니다. 

(갈 1:14-15)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누가 불렀어요? 사도바울을? 예수님께서 언제 불렀느냐면 물론 만세전부터 불렀겠지만 행9장1절부터 보면 사도바울이 그때 다메섹에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하나님의 교회를 칠라고 공문을 가지고서 가는 도중에 예수님한테 붙들렸습니다. 눈을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했지요. 그러고부터 계시를 통해 받아서 어디든지 자기는 사람에게서 배운 게 아니다. 아무도 난 누구한테도 배우지 않고 바로 직접계시를 통해서 배웠다. 그래서 자기는 뭐인가 확신을 가졌을 때에는 사람들이 확신을 가졌을 때에는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얼마나 참 반가운 소리입니까? 자기가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을 위해서는 이 사명을 마치려 하기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그래서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돌에 맞거나 태장으로 맞거나 또 빠따로 맞거나 뭐로 맞거나 간에 그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염려가 있다면 뭐있다고요? 

(고후 11:23-2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졌고 계시를 통해서 자기에게 깨달음이 있었을 때에 그 비밀을 깨달음이 있었을 때에 그만큼 노력하고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항상 하늘나라를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 계시부분 사도바울의 이걸 다 찾아보려면 다 보려면 시간이 부족한데요. 

 

사도바울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아까 갈4장22절에서 보니까 이 여자들은 뭐라고요? 두 언약이라 여기 아마 신학에서 모두 배우는 두 언약이라는 걸 잘 모를 거예요. 하여간 새언약을 모르면 두언약을 잘 모를 거예요. 물론 모세율법은 알겠지만은 이 새언약을 모르면 두언약에 대해서 잘 모를 겁니다. 또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것도 모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든지 두언약에 대한 문제라든지 지상에 예루살렘이나 하늘 예루살렘이라든지 여기 또 부활에 대한 문제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라든지. 천년왕국에 대한 것도 언제 천년 왕국이 생기는지도 모르고 천년왕국이 1900년 전에 있다 갔다고 예수님 초림 했을 때 천년왕국이 지나갔다고 이건 앞으로 우리가 이거 한 가지 알아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안다고 떠들죠? 요한계시록 안다고 하게 되면 그러면 계1장부터 계22장까지 다 알아야되요 다 알아야 어느 부분을 내놓고 이건 이렇다하고 말할 수 있지 이걸 다 모르면서 어느 부분 한 부분만 가지고 요렇다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요한계시록1장에서부터 22장까지 다 휑하니 알기 전에는 안다고 해선 모릅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여기13장이나 12장이나 여기 9장,8장이나 여기 뭐요?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어느 부분 자기에게 맞춰가지고 딱 하나 꺼내가지고 요건 고거다 그런데 그걸 한번 물어보려고 다른 건 다 몰라도 요건 뭐요?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에 대한 참 오묘한 것은 한번 새언약이라든지 옛언약이라든지 이런 글뿐만 아니라 여기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의 기록한 곳에는 물론 좋은데 간다는 것은 말했지만 어떻게 까지든지 여기 변화의 문제 고전15장1절~ 부터 고전15장은 뭐이냐면 부활장절인데 마지막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 변형 받느냐 하는 문제도 다른 사도들은 그런 거는 기록 못해요. 그러니까 이 사도바울의 그 깨달음을 그 편지를 통해서 잘 연구하게 되면은 사도바울이 어느 정도 깨달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