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용기란 > 참 된 용기란

기름가마에서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도 살수도 있을 거 아닙니까? 기름가마에서도 죽지 않고 살려 내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라도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마는 각자의 맡은 바 사명이 있어요. 여러 학생들도 청년들도 그 맡은 사명이 있어요.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위협이 있던지 간에 그러면 요한이 사명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요한계시록을 써서 이제 세상에다가 전해줘야 될 사명감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에 기름가마에서 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용기를 갖는 것 외정당시에도 보면 장로교 이런 데에서도 유난히 그렇게 신사참배 하라, 우상숭배 하라 일부러 끌어다가 절하라. 해운대 뒤에 역전 교회 목사가 있었는데 목사가 있고 그 부인이 열렬한 신자였고 젖 먹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런데 신사참배를 시켰는데 누구보다도 목사는 더 신사참배 시켰어요. 목사도 끌려갔고 아내도 붙들려 갔어요. 근데 오히려 가족을 생각해서는 부인이 신사참배를 하고 나와야 될 것 아니냐 절만하면 놔주니까 절하고 나와서 어린애들을 키울 사람이 그 사람은 끝끝내 안하고 우상숭배 안하고 징역을 살았고 목사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사람 욕심으로 우리는 징역을 산다고 하니까 하면 되는데 철모르고 어린것들이 지금 물론 교회 하나님께서 보호해 믿음이 약한 탓이죠.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행함이 있다. 각자의 보호자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보호해 줄 사람이 보다도 하나님이 계신데 ...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면은 되겠지만 자기 마누라 성질은 잘 알았던 모양인 모양이죠? 저 사람은 죽으면 죽었지 신사참배 안 할 사람이다. 내외간이라 짐작은 했을 거라 안할거라 내가 신사참배 안하고 있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느냐?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도저히 못하겠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못하고 여자는 끝끝내 신사참배 안하고 이랬는데 그러면 그 믿음 용기, 그런 사람은 그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용기를 가질만한 믿음이 있고 그 사람들이 행하는 그것이 ( ) 대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니까.....

 

우리 일반이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언입니다. 베드로가 그 전에 3년 동안 예수님 따라다녔죠? 예수님 결국 붙들려 가지고 저 겟세마네 동산에 갖다 붙들러 갔는데 그 중에서 베드로가 가장 힘 있는 믿음의 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붙들려 가는데 뒤를 살금살금, 따라갔죠. 드러 내어서 따라가지 않고 그 사람들은 늘 홑이불 같은 거 쓰고 다니고 깔고 자고 그랬는데 멀찌감치 슬금슬금 따라갔는데 선생님이 이적, 기사를 행하신다 말이예요. 이적 기사를 행하시니까 저놈들이 아직 우리 주님의 능력을 몰라서 말이지 저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너희들 그러지만은 주님이 한번 호령 하면은 너희들 그만 혼비백산해가지고 다 자빠질 테니까 하고 멀찌감치 살금살금 따라가서 보니 끝까지 모욕을 당하고 그 사람들한테 뺨을 맞고 침을 뱉고 이 야단을 치더라도 꼼짝없이 당하고 왜 저렇게 당하고 계시는가?  

 

그러다가 그놈들한테 붙들려가지고 이 녀석이 나사렛 당파라고 나사렛 예수당이라고 가만히 보니까 저들 한테 붙들려가 죽겠거든, "아이고, 나 그 사람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했다는 것을 세 번을 부인했는데 그 부인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말이 있거든" 다 주를 버리고 오늘밤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 너희가 싫어 버려 도망할 것이라" 베드로가 힘 있게 자신 있게 다 주를 버릴지언정 저는 같이 죽을지언정 부인 안 하겠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아니라고 맹세를 했지마는 그게 아니 돼요? 위기에 딱 닥쳤는데 그러니까 할 수 없죠. 예수님 난 그 사람 모른다고 다음에 또 그러니까. 맹세해가면서 모른다고 그러자 닭이 홰를 치고 꽥꽥하고 울었다. 그 닭 우는 소리 듣고 닭이 세 번 우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에 속속들이 다 아시는가? 그래 밖에 나가서 울었다. 그 후에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시고 믿음이 나가지고 할 때에 그때는 사도행전 2장에 볼 것 같으면 베드로의 담대히 증거하는 말씀이 있죠. 

(행 2:14-17)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기 지금 베드로가 일어나서 지금 오순절에 성령 충만한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했냐면 저 사람들이 횡설수설한 것이 분명히 새 술에 취했다. 새 술이 좀 독하긴 독하나 봐요 새 술이 취했다니까 베드로가 이런 말해요. 이 사람들이 너희 생각과 같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지금 오전 9시인데(제 삼시) 술 취할 리가 있나 아직 하나님께 제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아직 제사 중인데 술 먹을 리가 있느냐? 그런 게 아니고 요엘 선지자 예언대로 이렇게 됐으니까 말세에 내가 내 신은 내 종에게 부어 주신다 하는 그 예언(요엘 선지자 예언)이 바로 이때에 응했다. 하고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처음 예수님 세 번 부인한 그때하고 지금하고 베드로라고 해서 항상 같은 때가 아니고 성령을 받지 못해 3년 동안 예수님 따라다녔지만 벌써 3년 동안 따라다닌 그 기간까지는 우리 이치만 알았고 예수님만 알아서 따라다녔을 뿐이지 그 능력이 없어 예언을 예수님께 듣기야 많이 들었지마는 그것을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말세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일부로서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담대히 증거하게 되고 예언을 확실하게 됐을 때에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살피는 것이 아름다우니라. 여기 베드로는 얼마나 확신을 가졌느냐 하면 자기가 눈으로 봐서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고 오순절의 요엘 선지자 예언을 자기가 친히 적응을 해봤고 성령이 충만했을 때 구약의 모든 선지자의 기록한 예언이 오늘날의 시절에 관한 예언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분명한 예언이 우리만 분명하다고 해서 그것이 분명한 게 아니라 각자 마음에 이 편지서는 본 여러분들이 특별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살피는 것이 가하니라. 이것이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담대히 증거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더라도 반갑게 얼마든지 기분 좋게 당할 수 있었지 

 

만약에 이런 예언이 그들에게 확실한 예언이 아니었다 할 것 같으면 성경은 … 벌써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 끌려갔을 때 가야바 앞에서 당시에 예수님 모른다 할 때 지금 담대히 증거할 때와 하늘과 땅 차이로서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예언은 확실했을 때 요엘 선지자 예언 확실할 때에 담대히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 부어 주심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예언이 바로 우리에게 확실한 성령의 역사 … 확실하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거나 눈으로 잘못 보면 또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그래도 예수님 부활하실 때에 제자들 보고 눈으로 보기는 봤는데 사실인가 아닌가. 부활한걸. 봤는데 참말로 부활했나? 유령이 나타났는 가보다. 그래서 유령을 볼 수도 있다. 눈으로 유령을 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아라. 너희 손 내밀어서 만져보아라 그러면 눈으로 보는 것하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하고 어떤 틀린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 옛날 구약당시에 대한 우리 모세의 이야기 한번 보겠습니다. 

(히 11:24-28)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여기 모세에 대해 설명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 요새 공주의 아들하고 요새 뭐하고 비교해 볼 수 있습니까? 대통령하고 바꿀 수 있습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직책하고 오늘날 대통령하고 바꾸지 않아요. 대통령이 아무리 영광의 대통령 자리에 있다하더라도……그런 자리를 부인하게 된 것은 내가 이 일은 내가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한다. 난 공주의 아들도 아니다. 하고서 오히려 고난 받는 자기백성,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은, 금 보화 보다도 큰 재물로 여겼다. 큰 재물이라는 것은 세상의 큰 재물, 믿음,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변치 않을 상을 받을 것을 바라봤기 때문에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세상 상이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대강 이야기 하자면 모세가 클 때에 유모가 누구냐면 생모가 유모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모세가 이런 큰 힘을 얻어가지고 출애굽 이동을 하게 되느냐 하면 자기를 낳아 주신 생모가 유모가 되가지고서는 모세를 기를 때에 젖먹이며 키워가면서 점점 자랄 때에 그 아이에게 사상적으로 너는 히브리인이다. 가장 이 앞으로 이 나라를 이 히브리 족속을 구출할만한 인재로서 태어났으니까 사명감을 잊지 말고 너는 네 사명감을 강하게 길러라. 그러면 어머니는 무엇을 어떻게 믿고 무엇을 생각했느냐? 창15장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것이 있습니다. 

(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면 너는 정녕히 알아라. (분명하게, 똑똑하게 알아라) 아마 요새 이렇게 말할 것 같으면 너는 그 책에다가 이것을 기록해 둬라 그땐 책이 없었거든 그 당시에는 너 마음속에 간직해 뒀다가 그러면 아브라함이 그 후에 이 사실을 ( ) 아직 안 죽었을 때지요 ( ) 아브라함에게 정녕히 알라 한 것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이냐면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 후손에게 거기서 출애굽 하는 후손들에게 이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필요하다는건 뭐냐면 예언입이다. 모세가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힘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힘을 얻어서 출애굽 했지마는 모세가 40살쯤 돼서 연대를 세어보니까 ( ) 그래서 40년이 됐으니까 때가 바로 이때다. 그래서 애굽에서 40년을 공부해가지고 세상에 나가가지고 한번 인도 해볼라고, 40년 동안 공부했으니 공부 많이 했을 거 아닙니까? 최고학문을 다 했을 텐데 세상에 나가서 우리 민족을 한번 살펴보고 인도해보려고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족 히브리사람하고 애굽 사람하고 싸우고 있다. 언제든지 싸움을 싸울 때에는 우리도 일본에 가서 있을 때에 일본사람하고 한국 사람하고 싸움을 잘해요. 그러면 한국 사람은 단체가 되어 가지고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일본사람 두드려 패고 그랬어요. 머리는 더 좋은데 단체가 안돼요 지금 그렇죠. 일본 사할린이라고 소련 땅인데 거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서 살지만은 일본사람만은 못살아요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면 같이 종족이라고 모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손등에다가 띠도 두르고 또 이제 나이 따라서 형님동생. 동족을 사랑하게 돼있죠. 나가서 보니까 애굽 사람이 히브리사람을 갖다가 약하다고 두들겨 패고 이러니 그래서 자기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격분했다고 이놈의 자식이 어디 우리 동족을 때리느냐고 그래서 두들겨 때린다는 것이 죽어버렸어요. 죽으니까 모래사장에 파묻어 감쪽같이 해 놨는데 그 다음에 떡 나가서 구경하는데 같은 동족끼리 싸우거든 그래서 도와줄 땐 약자를 도와주지 강자를 도와주는 게 아니거든 힘센 사람보고 너희는 같은 동족끼리 왜 싸우느냐? 좋게 타일러주니까 이놈도 격분한 나머지 사람의 입이라는 것은 방정맞아서 말할 때나 안 할때나 함부로 하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뭐라고 했냐면 너희가 모든 것을 다 알면은 온전하지 못하지만은 우리말이 …… 이 사람이 그만 격분한 나머지 애굽 사람 때려죽이더니 나 때려죽인다고 폭로를 해버렸어요. 지가 무슨 법관이나 되는 줄 알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한다고 드러내 놨으니 거기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애굽 사람 죽이고 히브리 사람인 것을 발각됐으니 말이죠. 그래서 도망가가지고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 가가지고 40년을 미디안 제사장의 양을 쳤어요. 양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양을 참 말 안 듣습니다. 당기면 잘 안 끌려오고 당기다 보니 줄이 끊어져서 이놈이 막 도망을 가거든 순하긴 뭘 순한 건 약하니까 순한 거 같지 저희끼리 있으면 안 순해요. 약자 저희끼리 있으면 안 순해요. 도망가는 걸 그만 풀밭에서 말뚝 그것 갖다 친다는 게 이놈의 양의 다리가 딸깍 부러졌다. 남의 양을 치다 성질 난다고 때린다는 게 양다리가 부러져 주인한테 욕을 먹을 것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그 자연의 법칙 속에서 40년을 미디안 제사장의 양을 쳤으니 속 썩을 건 다 썩었고 이제 온순해 질건 다 온순해졌고 거기에서 인제 이스라엘 백성을 통솔할 그 통솔력을 배울 것이 그 속에서 나왔습니다. 애굽 궁성 안에서 배운40년 이건 다 헛것이죠. 이 세상에서 대학 뭐 다 나와야 그것 헛것이에요. 미디안 제사장 집에서 40년간 양을 쳐서 하나님께서 너 이제 그만했으면 됐다. 

 

그래서 모세가 그 힘을 얻었다는 것은 창세기 15장13절에 볼 것 같으면 『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가 400년이 지낸 후에 나오리라 』그러면 출12장42절에 보면은 400년에 나온 것이 아니고 430년 만에 나왔다. 그런데 여기는 400년이라고 했는데 430년이냐?  여기 사실은 400년이라고 딱 하지 않았어요. 여기 보면 그 후라고 했거든 400년 동안 네 가정을 괴롭게 할 것이고 그 후에 내가 그 나라를 징치한 후에 … 그 후라는 것은 기간이 없지요. … 그래서 예언으로서 내가 신앙을 굳게 다졌을 때에 생명을 얻는다. 

(단 9:1-4)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보면 다니엘이 무엇을 깨달았다? 예레미야 선지자 예언한 그 70년 연수를 깨달았다. 그래서 가만히 손을 꼽아보니까 이제 70년이 다 됐어요. 70년이 됐다 고해서 가만히 있어서 됩니까?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고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분별하라고 했어요. 그 시대를 분별하고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까? 시대를 분별하라는 말씀은 이 시대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타나는데 우리시대에 와서 성경의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우리시대에 예언한 바가 있으면 그 시대를 따라 여러분들이 기도를 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구하지 않으면 안 준다고 그래서 다니엘은 그때가 되어서 지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니까 

(단 9:21-23)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이렇게 그때가 되어서는 다니엘은 하루 몇 번씩 기도하고 70년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깨달았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할 그 당시에 그러면 그 예언을 다 믿었습니까?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고 침략 받아서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황무지가 될 때에 그 즈음에. 이 망국 지경에 이를 때에는 거짓선지자가 많아요. 오히려 국록을 먹고 그 모든 백성들이 환영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들이 거짓선지자에게 이렇게 칭찬했느니라. 너희는 사람들에게서 칭찬받는 것을 좋게 말라 칭찬은 거짓선지자에게 칭찬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참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냐면 가장 극소수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냐의 선지자 다른 선지자의 예언을 믿었지마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은 사람은 극소수 중에서도 네 사람밖에 없어요. 다니엘과 3친구 어째서 다니엘과 세 사람만 있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냐면 그걸 잘 아셔야 해요 왜 중요한지 그때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는 사람이 없었느냐 그렇게 많이 포로로 잡혀왔지마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는 사람은 어떤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어디로 갔습니까? 사자 굴, 사자 굴에 들어가더라고 어인의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는 자기대로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3번씩 기도시간 꼭꼭 지켰던 것입니다.

당신을 섬기는 어떠한 자들이던지 왕의 밑의 측근이라도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게 가차없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어인으로 찍어 놨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죠. 자기는 당당히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에 세번 기도를 했습니다.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이런 예언을 확실하지 못하면 예언 확실하지 못하면. 거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 텐데 수만 명이 붙들려서 그렇지만 어느 누가 그렇게 담대히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예언을 확실하게 예레미야의 선지자 다니엘이 그랬고 그 다음에는 세친구들은 또 어떤 용기를 가졌습니까? 우상에 절 안 하지요. 절하면 어떤 데요. 만약 절 안하면 어떻게 돼요? 거기는 불 속에 들어가야 돼요. 철 녹이는 용광로에 7배나 더 뜨겁게 한 용광로 거기에 들어가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거기에 들어갈 각오하고 우상에 절하지 않는 믿음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러한 힘이 나와야 되겠는데 그들은 예언을 확실하기 때문에 그래요. 

(렘 25:10-12)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져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했는데 가서 왕을 섬겨야 돼요. 그래서 세친구들은 바벨론 왕을 섬겨요. 바벨론 왕의 그 나라 왕을 섬겼고 그 나라 제상이 됐고, 그러니까 이런 예언을 확실히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 예언을 통해가지고 ……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지 않은 것이 …… 큰 나중에는 포로로 잡혀가서도 예레미야의 예언을 잘 믿은 사람은 축복을 받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을 받았다. 우리 다윗에 대한 역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삼상 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지금 다윗의 용기라고 할 것 같으면 역사상 최대의 큰 인물 이였죠. 다윗의 역사를 빼 버리면 우리 구약성경을 볼 때… 그럼 다윗이 사자를 때려죽였고 곰을 때려죽였고 그러고 골리앗대장을 때려죽였습니다. 그러면 이용기가 어디서 나오나? 물론 본래 힘이 있는 것도 힘인데 옛날에 삼손이가 힘이 어디서 났느냐? 머리카락에서 머리를 깎아버리고 힘이 없어져 버렸고 머리를 기르면 힘이 나고 이랬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다윗은 힘이 어디서 나오냐 하면 물론 어느 정도 자기의 힘도 있었겠지만 힘이 있다고 해서 다 쓰는 것도 아닙니다. 말도 힘이 있어요. 말도 힘이 있는데 가라후도 끝에 사할린에 목장들이 많아요 소목장 있고 말 목장 있고 이 소목장에 가서 보면 밤에는 어떻게 자느냐면 소는 등댈만하게 안에 조그맣게 진을 치고 등을 안으로 해서 머리는 밖으로 해서 소는 어떻게 자요? 목장의 있는 소들은 그렇게 하질 않고 서서 자요. 궁둥이를 안으로 넣고 대가리 밖으로 내놓고 어째서 그렇게 하느냐? 소는 머리 다 내놓고 적이 오면 뿔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무기가 밖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죠? 말은 무기가 뭐냐면 뒷발근육이 무기라고 뒷발을 뒤로 내놓고 대가리만 내놓고 자는데

 

그런데 이 곰이란 놈이 힘이 어지간히 쎄긴 쎄지만 말도 힘도 세고 뛰기도 잘 뛰지요 아마 곰이 지가 아무리 잘 뛴다고 해도 말만은 못해요. 말이 곰만 보면 뛰지 못해요. 곰이 저보다 힘이 세니까 달아나면 살지 달아나지 못해요 곰이 힘이 어떻게 쎄냐면요 말 같은 거 앞다리 치면요 부러져요 앞발을 찧는다고 앞발 부러지면 어깨에 딱 걸쳐 앞발 둘러메고 죽은 거 아니거든 눈은 멀뚱멀뚱 지고 매고 뜯어먹고 근데 곰이 한 말 목장에 왔어요. 뺑 둘러서 궁둥이만 내놓고 자니까 어느 놈이 살점이 먹을 만한 이놈이 빙빙 돌아다니까 말들은 서로 대가리 맞대니 뒤는 안 봅니다. 무조건 그냥 걷어차기만 하면 되니까 거치적대니까 뭔가 걷어차니까 곰 대가리를 제아무리 세다고 ( ) 그때 곰 소리 듣고 모두 벌벌벌 떨고 저희가 죽여 놓고선, 다윗은 여기서 용기를 얻는 것을 어떻게 얻었냐? 

(삼상 16:7-1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때 용기백배 하고 이제는 감히 누가 내 앞에 오겠느냐? 사자가 덤벼들라면 덤벼들어라. 다윗이 재주가 있는 것은 양을 치기 위해서 사람이 적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을 충성한다고 무엇이든 자기 맡은 바 직책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큰 것을 주시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작은 일에도 충성하고 노력하면 …… 아버지 양을 칠 때에 어떻게 하면 양을 좀 살을 찌우고 잘 키울 수 있느냐는 거기에 …… 정신이 다 들었을 때에는 …… 혼자서도 10명이 할 수 있는 …… 목마른 양들에게는 물가에 인도하고 …… 양이 어떻게 모아 들이느냐? 종하나 땡땡 치면 ……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가지고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름부음을 줬다. 어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을 때에 어디든지 뛰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 어떤 예언을 가졌느냐? 옛날에는 그것하나 아주 어려운 거 하나씩 그거 가지고 모세는 창 15:13에 있는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나 한 그 한마디 가지고 그런 용기를 얻었어요.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 그 예언(말) 하나가지고 용기를 얻었어요. 다윗은 기름 부음 받았다는 이것 한가지 가지고 용기를 얻었어요. 우리는 몇 가지가 있느냐면 여러 수십 가지가 있습니다. 계7장에 볼 것 144,000은 하나님의 인을 받았고 인 받았다고 그 자부심을 가져야 되겠는데 그 자부심이 …… 이것은 확실성 있는 예언 …… 수십 가지 예언이 돼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고도 내가 그러한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를 것 같으면 믿음이 용기를 낼 수가 없어요. 용기는 내가 확신을 해야 되는 거거든요 확신을 하기까지 어떻게 되느냐? 자꾸 봐야죠.

(행 17:11-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 

"날마다" 이걸 날마다 봐야 한다구요. 왜 날마다 봐야 하냐면 마귀는 쉴 새 없이 우리 뒤에 와서 꿈틀거려요. 마귀를 물리쳐야 되는데 마귀를 물리치는 건 하나님말씀 말씀을 안가지면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말씀을 듣고 간절한 마음으로써 말씀을 받아가지고 과연 그러한지 그렇지 않는지 내가 참으로 인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확신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내가 엘리야 사명에 들었는지 멜기세덱 반차에 속했는지 하나님의 인을 받고 있는지 144,000중에 내가 참석했는지 이것 확신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만 확실할 것 같으면 어디까지든지 용기를 낼 수 있어요. 우리는 용기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용기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용기 있는 신앙을 갖지 않으면 믿음이 없으면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요?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믿음 우리에게는 예언을 통해가지고 …… 날마다 공부하고 확실한 믿음 가지시고 용기 있는 믿음 가지시고 어디가든지 우리는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아멘-